나는 12년을 넘게 한 회사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왔다. 새벽에 퇴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휴가기간에도 미팅에 참석하고 고객의 전화를 받고 팀원들과 소통했다. 하지만 2025년 2월 27일 저녁, 그때까지도 일하고 있던 나는 APAC 사장에게서 “당신의 직무는 이제 이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되었다. 업무 실적이나 팀 성과, 그리고 항상 최고점을 받아오던 나의 인사고과 점수와는 무관하게, 회사는 ‘경영상의 이유’라는 이름으로 내 역할을 없애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건 한국인 HR을 통한 형식적인 설명과, 마지막엔 ‘대기발령 조치’라는 일방적 통보였다. 이 글은 내가 겪은 그 퇴장의 순간을 담은 기록이며, 리더로서 끝까지 책임을 다했지만 제거된 사람의 이야기다.
1. APAC 사장의 한마디, "너의 역할은 이제 이 회사에 존재하지 않아"
해고 통보는 나의 매니저도 아니고 HR도 아니었다. 바로 APAC 사장이 직접 면담을 진행했다.
그는 비교적 담담하게 나에게 말했다.
“회사의 구조조정 방향상, 너의 직무는 더 이상 이 조직에서 유지될 필요가 없다.”
“Eliminat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그 단어 하나가 내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고,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대화를 중단하고, 한국인 HR 담당자를 호출했다.
2. HR이 내게 건넨 말은 ‘경영상 핑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곧바로 HR 담당자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이 올 줄 예기한 듯, 준비된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 “아시다시피 회사가 경영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에요.”
- “최근 수주 활동이 거의 없고, 이 상태로 간다면 조직이 버텨낼 여력이 부족한것 아시잖아요.”
- “급여가 높은 순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전체 생존이 어렵다고 봅니다.”
나는 되물었다.
“그럼 나보다 급여가 더 높은 사람은 왜 남겨진건가요?”
“방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직무 제거라면, 그 직무가 실제로 사라지나요?”
"지금 하는 이야기는 근로자와 협의되지 않은 일방적 해고 통보이지 않나요?"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했고, 마침내 말했다.
“해고 통보 아닙니다. 회사의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죠.
받아들이시지 않겠다면, 대기발령 형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강제적인 퇴출 절차의 시작이었다.
3. 내가 제거된 이유는 경영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경영상 이유의 해고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조직이 불편해했던 존재이기에 제거된 것이었다.
- 나는 직급이 높았다.
- 나는 팀을 리드했고, 영향력이 컸다.
- 나는 성과에 침묵하지 않았고, 문제를 지적했다.
- 나는 “예”만 하지 않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런 나의 성향은 위기 상황에서 통제 불가능하다고 판단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직무’를 없애는 방식으로 나를 제거했다.
단순한 해고가 아니라, 역할 자체를 조직에서 지운다는 선언이었다.
4. ‘대기발령’이라는 명분 아래 진행된 퇴출 시나리오
그날 나는 단지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회사는 노트북, 출입증, 이메일 삭제, 클라우드 권한 회수, 사내 시스템 차단 등 모든 수단을 통해 나를 조직에서 실질적으로 제거했다. 아마 내게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나는 이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모든 시나리오는 완성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로펌으로부터의 자문, HR의 훈련된 말투, 명확한 퇴출 시점, 형식적인 선택지 제시.
나는 그날 단 한 시간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5. 끝까지 리더였기에, 나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나는 마지막으로 팀원들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내가 없더라도 잘 해나가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고,
나와 함께 수년간 일했던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통보를 받은 시각은 업무시간 이후였기에, 나는 인사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사라져야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바로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
APAC 사장의 지시하에 HR이 내게 “지금 바로 정리하고 나가주세요” 라고 말했지만,
나는 당장 내일부터 곤경에 빠질 팀을 두고 그냥 떠날 수 없었다.
- 내가 관리하고 있던 우리 팀 클라우드 관리 권한을 팀원에게 넘겨주었고
- 프로젝트 관련 폴더를 정리해서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권한 인계를 하였고
- 이슈 리스트를 남기고, 다음 담당자를 배정했다
- 자정 가까이 사무실에 남아, 마지막까지 리더로서 책임을 다했다
나는 사무실을 떠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나는 내가 했던 일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내보냈지만, 나는 내 책임을 다했다.”
6. 조직은 가장 충성한 사람부터 정리한다
12년을 넘게 나는 회사에 내 모든 시간을 바쳤다.
거의 모든 날을 자정이 가까워질때까지 일하거나 밤을 새워서가며 일했고, 성공한 프로젝트 대부분에 나는 중심에 있었다.
그런 내가 한순간에 ‘부담’이 되었고, 경영상의 이유라는 말 아래 제거 대상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회사를 배신하지 않았다. 회사가 나를 배신했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해고 통보를 받고 '배신' 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어쩌면 감정적인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을 일하며 회사에 보여왔던 충성심과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에게 가차없이 한순간에 대기발령을 가장한 해고 통보를 하며, 회사 출입 금지 조치를 내린 것은 내가 회사에 쏟아온 수년간의 노력과 헌신을 단 한순간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무리하며
누구나 회사에서 자신의 가치가 인정받길 원한다.
그러나 회사는 때로 성과보다 통제 가능성을 선택한다.
내가 겪은 일은 그 단면이었다.
이 글은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해왔고, 그들은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 다음 글에서는 대기발령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실질적 해고 통보로 받았던 여러 법적 자문들을 바탕으로, 회사들이 직원들을 해고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공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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